슬픈 여인 윤정희 (백건우와 윤정희)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커튼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때 잔잔한 선율은 홀 바닥으로 내려앉습니다. 슈베르트 곡, '리스트'는 연인에게 바치는"사랑의 연정"입니다. 바이올린 연주회에서 윤정희가 남편을 바라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던 그 곡입니다. 부부는 늘 함께 있기에 휴대전화는 한 대만 씁니다. 남편이 잘라주고 매만져주기 때문에 미용실에도 가지 않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스타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로 살아온 삶. 백건우를 뺀 윤정희이나 윤정희를 뺀 백건우는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가리켜 "꿈을 먹고사는 소녀"라고 합니다. 무서운 치매 여보! 치약이 떨어졌어요~! 아내는 초점 잃은 눈으로 밥그릇만 쳐다봅니다. 여보!나야 나! 왜 그래? 영혼마저 잿빛이 되어버린 치매 앞에서남편은 할 말을 잊었습니다. 아내가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면서 쓸쓸히 창밖을 내다봅니다. 공교롭게도 윤정희의 마지막 영화 "시(詩)"에서 주인공 역할은 치매를 앓는 할머니였습니다. 아내가 아프고 난 뒤에 피아노 소리가 달라졌어요. 남편의 말에 한 가닥 위안이 됩니다.
남편 백건우가 아내 윤정희에게 보내는 헌정시(獻呈詩)입니다.
사랑
흐느낌인가요? 하소연인가요? 아니요. 넋두리였지요.
창백한 노을 아련한 슬픔 긴 긴 꿈이었나요?
웃음이 터질 듯 미소를 머금은 채 맥없이 불러보는 애달픈 아우성 내 사랑아!
찰리 차프린 인생이란 현명한 사람에게는 꿈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유희
부자에게는 희극 빈자에게는 비극 (영국신사의 좋은글)
여름향기 고현정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 햇살이 가득한 라벤더밭
꽃잎이 난분분하여
사뿐히 내려앉는 좁다랗고 호젓한 길
공중에 떠다니는 미묘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먼 과거의 그림자가 느리게 정박되어 간다
봄이 찾아오면 떠돌아다니는
기분을 좋게 해주는 라일락의 향신료
심장이라도 관통할 듯 가고 없는 귀하의 환영
불씨가 깜박이던 가을밤의 캠프파이어
내리는 비의 향기는 소리 없는 익숙한 음성
해마다 유월이면 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당신의 흑백 영상을 본다
매 해 치러야만 하는 행사처럼
폭열을 뿜어내던 내 육신의 오한
오래된 겨울의 페이지 구석구석에서
닿을 수 없는 서약만이 여름의 향기로 젖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