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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오늘 내가 슬픔을 넘어 기뻐해야 하는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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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슬픔을 넘어 기뻐해야 하는 이유

설악산곰 2023. 5. 1. 11:58

리차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과 대한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의 전설적인 실화이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그는 당시에 미군 군수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 27일, 부산 역 건너편 산 판자촌에 큰 불이 났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 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 커녕 먹을 것조차 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 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휴전이 되고도 돌아가지 않고,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세워달라" 고 청하였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관계자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재학생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른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 세웠다.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쑤근댔지만 개의치않았고 온 맘과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 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연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 달라''고...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에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 여사에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 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한 여사는 한 때 간첩 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생을 달리 했다. 부산 UN공원묘원에 묻혀 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 씨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다.

이 땅에는 이러한 장군을 기리는 동상 하나가 없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아니 부산대학교에도 메리놀병원에도 물론 없다. 그런데 오늘, 장군이 떠난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 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을 마련하기로 했다.

브라보!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한다고. 오늘 그 첫 결의를 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보자. 70년 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 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원씩 내보자.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내보자. 1만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0만 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니 또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 것만 같다.그리고 정부는 장군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는 소식이다. 너무 늦었지만 감사한 일이다. 정말 기쁜 날이다.

팝콘이 탁탁 터지듯이 그렇게 내 온 몸의 세포들이 기쁨에 겨워 꿈틀거린다. 에스프레소 덕분인가? 까뮈 엑스오 덕분인가? 이제 나는 죽어도 한묘숙 여사를 만나 웃으며 두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브라보! (박선영 교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영동병원 슬로건과 환자를 위한  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