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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허송세월(虛送歲月) 본문

노인학

허송세월(虛送歲月)

설악산곰 2024. 8. 12. 02:50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나는 내가 사는 마을의 길 건너, 일산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쪼인다. 햇볕을 쪼일 때, 나와 해는 직접 마주 대해서 대등한 자연물이 된다.나와 해 사이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서 해에서 폭발하는 빛과 볕이 바로 내 몸에 닿는다.

나와 해 사이에는 사이가 없다. 그때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고 숨구멍이 열린다. 빛과 볕이 내 창자와 실핏줄의 먼 구석에까지 닿아서 음습한 오지가 환해지고 공해에 찌든 간과 허파가 기지개를 켠다. 햇볕을 쪼일 때, 나는 햇볕을 만지고 마시고 햇볕에 내 몸을 부빈다. 햇볕을 쪼일 때, 내 몸의 관능은 우주 공간으로 확장되어서 나는 옷을 모두 벗고 발가숭이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햇볕을 쪼일 때, 나는 내 생명이 천왕성, 명왕성 같은 먼 별들과도 존재를 마주 대하고 있음을 안다.햇볕을 쪼일 때, 나와 해 사이의 직접성을 훼손하는 장애물은 없고,내 그림자가 그 직접성의 증거로 내 밑에 깔린다.

햇볕은 내가 유산으로 물려받았거나 나 스스로 설치한 차단막을 일시에 제거해서 몸과 해가 맞닿는 신천지를 열어 젖힌다. 이 직접성은 자명해서 언설이나 실험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 난데없는 밝음에 놀라면서도 나는 나와 해 사이를 가로막은 차단막을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갇혀 있거나 갇혀서 담장 틈새로 내다보고 있다. 햇볕을 쪼이면서 생각해보니 내 앞의 담장은 개념, 기호, 상징, 이미지, 자의식 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 언어적 장치와 그 파생물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면서도 이 차단막에 의지해서 세상을 이해하려 했는데, 이 가려짐은 삶의 전 범위를 포위하고 있어서 부자유가 오히려 아늑하고 친숙했다.

시간은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며 시각(時刻)은 시간의 흐름 위에서의 한 점이다. 공간은 전후‧좌우‧상하로 끝없이 펼쳐진 빈자리이다, 라고 사전에 적혀 있다. 9는 6에3을 더한 것이고 8은 9에서1을 뺀 것이라고 사전에 적혀 있다. 나는 이러한 언어작용으로는 대상을 인식할 수 없어서 답답했고, 장님처럼 세상을 더듬었다. 나는 지금 사전을 만든 사람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세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동어반복의 저주를 말하려 한다.

개념을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마주 보는 거울 두 개의 저편으로 언어의 허상은 무한대로 전개된다. 거울 뒷면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면 이 헛것이 무한 증식되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의 외양을 하고 없는 공간 속으로 전개되면서, 없는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다. 이 헛세계에서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고 언어도 아닌 것들이, 동서남북 어디에도 없는 것들이 나타나고 펼쳐지고 이어진다.

‘7은 4에3을 더한 것이다’ 라는 말은 ‘7은7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데, 7을 4더하기3의 결과가 아니라 7그 자체로서 말하려 해도 ‘7은7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A는A다’라고 말하면 맞는 말이지만 하나 마나 한 말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지만, 말의 껍데기는 남는다. 나는 개념이나 기호를 사용하기를 저어한다.나는 사과7개를 보면4더하기3의 결과를 떠올리지 않아도7을 체험할 수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을 설명하려 드는 나 자신을 나는 힘들어한다. 나는 갇혀 있다.

햇볕이 좋은 가을날에는 연못 속의 거북이들이 바위에 올라와서 볕을 쪼인다. 거북들은 좌선하는 승려처럼 고요히 앉아서 작은 눈을 꿈적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거북과 나는 햇볕 속에서 마주친다.거북이의 얼굴에는 눈, 코, 입, 귀, 이마가 모여서 표정을 이루고 있다. 이 표정은 개별적 생물체의 표정이고, 그 종(種)의 공통된 생김새이다. 얼굴에 이, 목, 구, 비가 모여서 표정의 개별성과 군집성을 동시에 이루는 구도는 거북과 내가 똑같다. 거북은 파충류이고 나는 포유류인데, 공원 연못가에서 마주 보며 햇볕을 쪼일 때 진화의 수억만 년 시간과 공간은 햇볕에 증발되어 버리고 거북과 나는 직접 마주친다. 거북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는지 알 수 없지만, 되도록 사귈 만한 존재로 비치기를 바란다.

나의 얼굴과 거북의 얼굴, 산책하는 개들의 얼굴과 막 도착한 철새들의 얼굴도 모두 구조가 같아서 나는 이 동물들과 내가 유전적 친연(親緣)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햇볕 속에서, 나의 생각은 과학적일 수가 없지만 논리와 개념이 제거된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始原)으로 향한다. 이 시원은 여기서 멀지 않다. 날이 저물면 거북들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일산 호수공원의 저녁 하늘은 강화, 김포 쪽 하늘부터 붉어진다. 갈 곳도 없고 올 사람도 없는 저녁에 나는 망원경으로 노을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노을은 내 몸과 마음속에 가득 찬다. 노을 속에서 수많은 색이 태어나고 스미고 번진다.

구름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난 신생의 색들이 위쪽으로 퍼져 가면, 태어난 지 오랜 색들은 어둠을 맞아들이면서 위쪽으로 물러선다. 색들은 시간과 더불어 짙어지면서 어둠 속으로 스미는데, 노을이 어둠과 합쳐지는 자리에는 솔기가 없다. 빛이 사라지면 색은 보이지 않는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색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지, 아니면 색은 빛을 따라서 사라졌다 가 빛이 돌아오면 다시 깨어나는 것인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눈(眼)으로 사물을 볼 수밖에 없고 이미 본 것에 의지해서 보는 중생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빛을 프리즘으로 분산하면 보라에서 빨강에 이르는 스펙트럼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이 나타나지만, 빛은 이 무한한 색들을 다 끌어안고 아무런 색도 아니다. 색은 ‘보라’혹은‘빨강’ 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은 과학에 미달한다. 색은 언어적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고, 화가의 물감으로 고정시킬 수 없다. 색은 흐름과 전개와 소멸로 이어지는 이동태(移動態)로서 활동한다. 빛은 활동하는 색의 기초 환경이고 에너지이다. 어둠에 합쳐지는 강화 쪽 노을을 보면서 나는 빛과 어둠과 시간의 바탕은 같은 것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이 그 사이를 흘러가고 있음을 본다.

시간을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라고 억지로 말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말로부터 소외되지만,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 수 있고,한 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 깊이 내려앉은 해가 빛과 색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젊은 어머니들이 노는 아이들을 핸드폰으로 불러들이면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또 하루가 노을 속으로 사위어 간다. (김 훈) 너무 어려워요. 7은 7이고, 햇볕은 햇볕이고, 무지개는 무지개이고 노을은 노을이다. 허송세월에 너무 심오한 생각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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