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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2023 광복절(光復節)에생각하는 숭중(崇中)종북(從北)한국좌파(左派)의뿌리 3명의지식인? 1 리영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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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광복절(光復節)에생각하는 숭중(崇中)종북(從北)한국좌파(左派)의뿌리 3명의지식인? 1 리영희

설악산곰 2023. 8. 15. 11:23

오늘은 광복 78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75주년일입니다. 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후 신생독립국 중 유일한 ‘30·50클럽’(1인당소득 3만달러에 인구 5000만명) 국가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정치·이념·사회적 양극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한국이 중후진국으로 다시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눈부신 발전 뒷켠에서 우리가 지독한 혼란과 분열을 겪는 데는 국민들의 의식과 판단에 영향을 미친 일부 지식인(知識人)들 탓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이들의 행적을 조명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고인(故人)이 된 세 명의 교수들(이하 경칭 생략)을 살펴봅니다.

親中主義 정치 선전물 쓴 리영희

먼저 한국 좌파 진영에서 우상을 깬 사상적 전환의 스승’, ‘민주화운동 의식화의 은사(恩師)’로 추앙받고 있는리영희(李泳禧·1929~2010)입니다. 그는 평북 운산군에서 태어나 1950년 국립해양대 졸업후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6·25 전쟁 중 군에 입대해 7년간 통역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제대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일했고 19687월부터 1971년까지는 합동통신 부장이었습니다. 이듬해 한양대 문리대 교수로 옮겼고 1976년부터 8년간 해직후 복직해 1995년 정년 퇴임했습니다.

리영희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중국공산당과 중국 현대사에 대한 왜곡(歪曲)입니다. 1974년과 1980년에 각각 낸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우상(偶像)과 이성(理性)>, 1977년 마오쩌둥(毛澤東) 사망후 그를 찬양한 일본과 구미의 좌파 지식인들이 쓴 글들을 번역해 낸 <8억인과의 대화> <10억인의 나라>에서입니다. 이 네 권의 평론집·번역서는 한국인들의 뇌리에 중공 신화(神話)’를 심었습니다. 지금 그의 저작들을 읽어보면 금방 졸속(拙速)품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유의 깊이, 논증의 체계, 자료의 신빙성 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을 면하기 힘든 엉성한 친중주의(親中主義) 정치 선전물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리영희는 1976728일 중국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뉴욕 정전(停電) 사태를 비교하며 탐욕에 물들어 약탈이나 하는 미국인들보다 중공 시민들의 시민수준이 높다며 이를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문화혁명 체제의 우수성이라고 칭송했습니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인 <우상과 이성>의 제3현대 중국의 이해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쪽수 표시는 1980년 개정판 기준) 마오쩌둥 사상의 본질은 인간주의이므로 서구식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90~98) “중국 혁명은 물질 생산보다 인간의 평등, 능률 향상보다 인간의 소외를 해소, 극복한다는 데 중점을 두었다.”(93) “마오쩌둥은 양쯔강에서 수영하고 극장 속에서 군중에 섞여 경극을 감상하고, 행사 때에는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것으로 신격화(神格化)라면 신격화를 완성했다.”(108)

마오쩌둥·중공·문혁 진실외면하고 美化만.......

리영희는 <8억인과의 대화>에서는 소련 경제사 전문가인 기쿠치 마사노리(菊池昌典) 도쿄대 교수가 1967년 중국을 관찰한 뒤 1971년에 쓴 글을 소개하면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달리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고 단언했다”(330)고 전했습니다. 문화혁명(1966~76)이 진행 중이던 때 일본인 교수가 잠깐 보고 와서 쓴 글을, 리영희는 문화혁명 종료 1년이 지난 시점(1977)에 수정도 없이 중국의 진실(眞實)’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실상은 어떤가요? 마오쩌둥이 1958년부터 62년까지 벌인 대약진운동으로 중국인들은 대규모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국가 농노(農奴)가 됐습니다. 5년여 동안 굶거나, 맞거나, 일하다 지쳐 숨진 인원만 3000~4500만명이라는 게 세계 학계의 일치된 연구 결론입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에서 10년 넘게 문화대혁명세미나 강의를 하는송재윤교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중국공산당 중앙이 27개월에 걸친 조사와 검증을 통해 19845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문혁(文革) 10년 동안 1728000여 명이 비자연적 원인(집단 린치, 테러 등 포함)으로 사망했다. 135000여명은 사형에 처했고 703만여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회복 불능의 불구가 됐다. 7만여호의 가정이 파괴됐다. 억울하게 죽임 당한 사람을 포함하면 피해자가 2000만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 좌파의 崇中·從北' 논리 제공

리영희는 덩샤오핑(鄧小平) 등장의 역사적 의미도 오독(誤讀)했습니다. 덩의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1983년 출간한 <10억인의 나라>에서, 그는 덩샤오핑 노선을 부정하는 프랑스 학자의 입을 빌어 울분을 드러냈습니다. “현 중국지도부(덩샤오핑)는 역사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수정주의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들도 결국은 패배를 면하지는 못하리라.”(54)

리영희는 “6·25는 민족의 독립통일을 위한 거사라는 논리를 펴며 남한은 혼란과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라고 했습니다. 관념론적 친중(親中)에다 친북(親北) 성향까지 장착한 그는 좌파 진영의 숭중(崇中·중국 숭상)과 종북(從北·북한 추종) 사고의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日帝)때 고위 공무원의 아들이자 평북 출신 거부(巨富)의 외손자였습니다. 리영희는 자신의 배경과 정반대 노선을 걸으면서 생전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아쉬운 것은 우파 진영이 좌파 지식인·언론의 리영희 보위(保衛) 및 신격화를 방관했다는 점입니다. 마오쩌둥의 반()인륜적인 폭압·살상 같은 해악(害惡)을 기록한 문헌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도 말입니다. (출처,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