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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의 편지’와 ‘어머니 말씀’ 본문

좋은시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의 편지’와 ‘어머니 말씀’

설악산곰 2023. 5. 8. 04:48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는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이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 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도량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 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 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지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어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날은 해가나고. 맑구나 싶은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한그릇 올리고 촛불 한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강을 건널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아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어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 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 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림태주)

'어머니 말씀'

세수는 남 보라고 씻는다냐? 머리 감으면 모자는 털어서 쓰고 싶고 목욕하면 헌 옷 입기 싫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것이 얼마나 가겠냐만은 날마다 새 날로 살아라고 아침마다 낯도 씻고 그런거 아니냐.. 안 그러면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낮을 왜 만날 씻겠냐?

고추 모종은 아카시 핀 뒤에 심어야 되고 배꽃 필 때 한 번은 추위가 더 있다. 뻐꾸기가 처음 울고 세 장날이 지나야 풋보리라도 베서 먹을 수 있는데, 처서 지나면 솔나무 밑이 훤하다 안 하더냐. 그래서 처서 전에 오는 비는 약비고, 처섯비는 사방 십리에 천석을 까먹는다 안 허냐.

나락이 피기 전에 비가 쫌 와야 할텐데.... 들깨는 해 뜨기 전에 털어야 꼬타리가 안 부서져서 일이 수월코, 참깨는 해가 나서 이슬이 말라야 꼬타리가 벌어져서 잘 털린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든 살펴봐 감서 해야 한다. 까치가 집 짓는 나무는 베는 것 아니다. 뭐든지 밉다가 곱다가 허제. 밉다고 다 없애면 세상에 뭐가 남겠냐? 낫이나 톱 들었다고 살아 있는 나무를 함부로 찍어 대면 나무가 앙 갚음하고, 괭이나 삽 들었다고 막심으로 땅을 찍으대면 땅도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쓸데 없는 말은 있어도 쓸데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나뭇가지를 봐라. 곧은 건 괭이자루, 휘어진 건 톱자루, 갈라진 건 멍에, 벌어진 건 지게, 약한 건 빗자루, 곧은 건 울타리로 쓴다. 나무도 큰 놈이 있고 작은 놈이 있는 것이나, 야문 놈이나 무른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도 한가지다. 생각해 봐라. 다 글로 잘 나가먼 농사는 누가 짓고, 변소는 누가 푸겠냐? 밥 하는 놈 따로 있고 묵는 놈 따로 있듯이, 말 잘 하는 놈 있고 힘 잘 쓰는 놈 있고, 헛간 짓는 사람 있고, 큰 집 짓는 사람 다 따로 있고, 돼지 잡는 사람, 장사 지낼 때 앞소리 하는 사람도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라도 없어봐라. 그 동네가 잘 되겠냐. 내 살아보니 그닥시리 잘난놈도 못난 놈도 없더라 허기사 다 지나고 보니까 잘 배우나 못 배우나 별 다른 거 없더라. 사람이 살고 지난 자리는, 사람마다 손 쓰고 마음 내기 나름이지, 많이 배운 것과는 상관이 없는 갑더라.

거둬감서 산 사람은 지난 자리도 따뜻하고, 모질게 거둬들이기만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죽고 없어지도 까시가 돋니라. 어쩌든지 서로 싸우지 말고 도와 가면서 살아라 해라. 다른 사람 눈에 눈물 빼고 득 본다 싶어도 끝을 맞춰 보면 별 거 없니라. 누구나 눈은 앞에 달렸고, 팔다리는 두 개라도 입은 한 개니까 사람이 욕심내 봐야 거기서 거기더라. 갈 때는 두손 두발 다 비었고. 말 못하는 나무나 짐승에게 베푸는 것도 우선 보기에는 어리석다 해도 길게 보면 득이라. 모든게 제 각각, 베풀면 베푼대로 받고, 해치면 해친 대로 받고 사니라.

그러니 사람한테야 굳이 말해서 뭐하겠냐? 내는 이미 이리 살았지만 너희들은 어쩌든지 눈 똑바로 뜨고 단단이 살펴서, 마르고 다져 진 땅만 밟고 살거라. 개는 더워도 털 없이 못 살고, 뱀이 춥다고 옷 입고는 못 사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나면, 아아는 두번 되고 어른은 한 번 된다더니, 어른은 되지도 못하고 아아만 또 됐다. 인자 느그들 아아들 타던 유모차에도 손을 짚어야 걷는다니. 세상에 수월한 일이 어디에 있냐? 하다 보면 손에 익고 또 몸 에 익고 그러면 그렇게 용 기가 생기는 것이지 다들그렇게 사는 것이지....(림태주)

 

옛노인말씀 하나도 틀린말 없네요. 우리 늙은이들이 듣고살던 그때 그말씀.그립습니다,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의 글 너무도 가슴 절절한 사연이 마음에 와 닿네요 어떻게 시골 노인네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 노벨 문학상 깜입니다

동작동 국립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