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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나의 아버지가 이런 분 인줄은 정말 몰랐어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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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가 이런 분 인줄은 정말 몰랐어요?

설악산곰 2024. 1. 5. 05:38

나의 아버지가 이런 분 인줄은 정말 몰랐어요?  진료실에서 환자분들이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제 딸이 시집가는 것은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잘 치료해 주세요.” 그러면 옆에 있는 따님은 쿨하게 대답한다. “아니요. 결혼 생각 없어요. 우리 엄마 말 무시하세요. 엄마, 또 시작이다. 주책스럽게….”정말 결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 나는 이런 질문을 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따님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시나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모르는 경우가 있다. 내가 키웠고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서 봐왔기에, 부모들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내 딸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방귀 소리만 들어도 어제 저녁에 무얼 먹었는지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나이 들며 변해 가는 딸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며, 최소한의 노력과 대화마저 안 하게 된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딸아이와는 그렇게 멀어진다. 어른이 되어 심리적으로 엄마로부터 독립한 딸이 남처럼 느껴진다. 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처음 알았어요.” 따님은 암을 진단받은 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보며 놀랐다고 했다. 환자는 임상시험 신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신약이 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기다리는 동안 암이 커질까 봐 따님과 나는 불안했다.  그런데 정작 환자는 평온했다. “저는 별로 불안하지 않아요. 다 내려놨어요. 치료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알아서 잘해 주실 거고, 좋은 결과가 있을지는 하늘에 달린 거고, 저는 그저 저에게 주어지는 오늘 하루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거예요. 설령 안 좋은 결과가 있더라도 할 수 없는 거죠. 어떻게 다 제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가겠어요.”

따님 말로는 아버지가 원래 성취욕이 많고 아등바등 살았던 사람이라고 했다. 조바심 많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암에 걸린 후의 아버지 모습은 따님이 알던 아버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따님은 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보면서 소위 심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고 한다.  아… 나는 그동안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도대체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후로 따님은 병원에 함께 오면서 아버지를 유심히 살피고 대화를 나누며 아버지에 대해 알아 나가기 시작했다. 모른다고 생각하자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했다.

환자의 의식이 없어지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환자가 의식이 없어진 상황에서 연명의료를 어떻게 할지를 정하기 위해 보호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종종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버지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런 질문에 선뜻 대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내가 관찰해온 바로는 오히려 가까운 가족이라고 주장할수록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방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할수록 상대방을 몰랐다. 오히려 가족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한 가족일수록 대화를 나누다 보면 환자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놀라곤 했다. 이하생략 (출처,중앙일보. 글 김범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