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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슬픈 중국 ..마우쩌둥(毛澤東)에 대한 비판(批判) 본문

시사

슬픈 중국 ..마우쩌둥(毛澤東)에 대한 비판(批判)

설악산곰 2023. 3. 12. 04:58

2023년 1월 1일 0시 직전이었다. 난징(南京) 신제커우(新街口) 광장에선 수백 명 인파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서 쑨원(孫文, 1866-1925)의 동상을 향해 달려갔다. 이내 동상 주변을 빽빽하게 빙 둘러싼 군중은 손에 쥐고 있던 풍선을 밤하늘 멀리 날려 보냈다. 제로-코비드 정책 폐기 후 감염자가 급등세를 보이는 민감한 시점임에도 자발적으로 모여든 대규모 군중은 민국혁명의 아버지 쑨원 동상 앞에 헌화하고 색색의 풍선을 날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3년간 갇혀 지내던 중국 인민으로선 실로 감격의 순간이었다. 실시간 동영상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전 세계 네티즌들은 촌음을 다퉈 감탄의 트윗을 날렸다. 지난해 11월 말의 백지 혁명이 급기야 불꽃 혁명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이 주류였다.

난징의 이벤트는 여느 때와 또 다른 중대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중국 인민이 경찰과 격한 몸싸움을 벌이며 항의했다는 점, 참신하고 유쾌한 이벤트를 연출해서 탄압을 일삼는 정부 당국을 조롱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난징의 시민들이 “쑨원”이라는 상징적 인물 아래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이 민감한 시점에 중국 인민은 왜 하필 마오쩌둥 동상 대신 쑨원의 동상 앞에 모여들었을까? (중략)

혁명 원로 리웨이한(李維漢, 1896-1984)의 발언도 눈길을 끈다. 그는 1918년 마오와 함께 후난성 창사에서 신민학회(新民學會)라는 결사체를 조직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리웨이한은 마오의 10대 과오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1.“신민주주의”만 잘 알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잘 몰랐다. 2.농민과 지주만 잘 알고 산업 노동자와 자본가는 잘 몰랐다. 3.농업만 잘 알고 공업은 잘 몰랐다. 4.정치경제학을 이해 못해 만년에야 경제학 교과서를 읽었는데, 스탈린의 <<사회주의 경제 문제>>만 공부했다. 5.경제 법칙을 연구하지 않고 정치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보았다. 6.지식분자에 대해선 세계관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고, 문외한이 전문가를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지식분자를) 취로구(臭老九, 악취 나는 9등 신분)라 비판했다. 7.농민 평균주의에 빠져서 1958년 일으킨 대약진은 소자산계급의 광열성(狂熱性)을 보여준다. 8.외부 문물을 중국이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국제수정주의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는데, 그의 자력갱생은 쇄국·자폐의 길이었다. 9.1964년 4대 현대화를 내걸고선, 1966년 다시 4대 파괴가 시작됐다. 10.옛날 책들만 파고들면서 고대를 현대에 적용한다고 떠벌렸다.

샤옌(夏衍, 1900-1995)은 반우파 운동 당시 마오쩌둥을 비판하면서 “1958년 마오 주석은 65세였는데, 노인성 의심증에 걸려 있었다”고 발언했다. 극작가 출신인 샤옌은 문학적 기지를 발휘해 그는 마오쩌둥의 오류를 다음의 16자로 정리했다. 거간애첨(拒諫愛諂, 직언을 거부하고 아첨을 좋아하고) 다의선변(多疑善變, 의심 많고 변덕스럽고) 언이무신(言而無信, 말에 신뢰가 없고) 면리장침(綿裏藏針, 부드러운 천 속에 바늘을 숨겨두고) 이 밖에도 마오쩌둥은 “속은 봉건주의자인데 겉만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으며, “입만 열면 진시황 얘기를 하고,” “마르크스-레닌의 저작이 아니라 중국의 25사(史) 등 옛날 책만 읽어서 봉건 사회의 제왕, 장상의 권모술수를 당내 투쟁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역사상 최대 폭군을 들라면 반드시 그를 꼽아야 한다”며 “주원장도 마오쩌둥에 못 미쳤다”는 발언도 나왔다.

마오쩌둥의 동료들이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에 대해 역사적 총평을 내렸다는 점에서 4천인 대토론회의 중대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이들의 논의는 1981년 6월 27일 발표된 “역사 결의”에 반영되었다. “4천인 대토론회”에 참석해서 이들의 비판을 직접 들은 덩샤오핑은 모두 9차례의 강화를 통해 “마오쩌둥 동지에 대한 폄훼와 모독은 당과 국가에 대한 폄훼이자 모독”이라면서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를 지나치게 기록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동시대 혁명 간부의 마오쩌둥 비판을 덩샤오핑도 다 무시할 순 없었다.(중략)

이후 중공 중앙은 자본주의 경제를 채택하면서도 마오쩌둥의 절대 권위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갔다. 그 결과 중국 지성계는 마오쩌둥 비판을 밀린 숙제처럼 방치하고 말았다. 중국 지식계는 대체 그 중대한 숙제를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난징의 인민이 쑨원의 동상 앞에 집결한 이 순간이 적기(適期)는 아닐까. 신해혁명 112주기를 맞이하는 오늘날도 민국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재윤의 슬픈중국)

3/10 중국 양회(兩會)에서 시진핑 3연임이 확정되었다. ‘중국양회(中國兩會) 중국에서 매년 진행되는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를 이르는 말이다. 이로써 중국은 시진핑이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1인 독재체재 영수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모든 권력이 공산당, 사회주의에 귀속 되었다는 말이다. 의사결정에 반대가 있을 수 없는 100% 찬성의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회인가? 그래도 아직 자유자본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론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음은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