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불경 (24)
설악산곰의하루

습도가 너무 높아서인지 밤새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쳤다. 새벽녘이 되자 더 사납게 비가 내리는데, 누워서 들으니 마치 폭포 아래 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일본의 게곤(華嚴)폭포 아래 서 있었던 생각이 났다. 이름만큼이나 웅장했던 화엄폭포는 한여름에도 꽤나 싸늘해서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때의 그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에 온 국토가 물바다가 되고, 여기저기서 괴로움의 비명이 들리는데, 그마저도 폭우에 파묻히는 듯하다. 온 국민의 마음이 힘들고 버거우니, 내게도 괴로움이 쌓인다. 어릴 적 금강 가까이 산 나는 이런 풍경을 몇 번이나 접했다. 불그스름한 금강물이 집안까지 무섭게 밀려드는 모습 말이다. 강이 범람하면 주변의 논밭이라곤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이어 집이 잠기고 마을이 잠겼다. 키우던 소가 떠내..

(들어가는말 생략) 성파 스님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불교가 있지만, 여신도를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 불교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찰에 가보시면 여성 신도를 ‘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러 보셨을 겁니다. 식사를 준비해주는 분들도 ‘공양주 보살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 ‘보살(菩薩)’은 무척 중요한 존재입니다. 사전에서는 ‘보살’을 ‘부처가 전생에서 수행하던 시절, 수기를 받은 이후의 몸’ ‘위로 보리(진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 등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관세음보살’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또 ‘문수보살’ ‘보현보살’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여성 신도를 이런 보살로 대우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산중에서도 장맛비를 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바쁘다. 물길에 가득 쌓인 낙엽을 치우고, 움푹 팬 도로도 정비했다. 무너질듯한 언덕엔 축대를 쌓아 돌리고, 질퍽한 마당에는 마사토를 깔고, 물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콘크리트 턱을 만들었다. 넉 달이나 하다 보니 도량 가꾸는 분들이 지칠 만도 하련만 오히려 서로를 위해 정성과 배려를 다한다. 그 선한 영향력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번져간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왔을 인부들을 위해 삶은 햇감자를 참으로 내어오는 공양주의 마음이나, 사람들의 걸음 높이까지 계산하여 계단을 만드는 목수의 손길이 정겹다. 밤길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을 설치하는 처사의 마음이나, 텃밭에 상추며 고추며 가지를 가꾸는 노보살의 마음이 다 한 가지이다. 『열자(列子)』탕문편에 춘추전국시대 거문고 명..

뜰 앞에 나가 비 갠 뒤의 맑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두 팔 벌려 한껏 품에 안아보았다. ‘하늘이 나를 안은 것인가, 내가 하늘을 품은 것인가.’ 도심의 혼탁한 기운과 소음도 맑은 허공이 다 감싸주었는지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오늘은 푸른 기운이 청룡암 도량에 가득하니, 어디선가 용이라도 꿈틀할 기세다. 청량한 아침, 물 한 동이 들고 나가 산문 앞 수국에 부어주었다. 절 앞에 놓아둔 수국이 하루가 다르게 뭉실뭉실 피어나 풍성하고 아름다워지더니, 고운 자태를 뽐내려고 자리싸움까지 하는 모양새다. 과연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보았다는 신선의 꽃이 바로 이 수국이련가 싶다. 何年植向仙壇上(하년식향선단상) 어느 해인가 신선 살던 곳에 심어 놓은 것을, 早晩移裁到梵家(조만이재도범가) 조석으로 이 절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