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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도라지꽃 이야기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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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 이야기 1

설악산곰 2024. 6. 26. 05:40

“나 죽은 뒤에 우르르 몰려와서 울고불고한들 무슨 소용이야. 살아 있을 때, 누가 누군지 얼굴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때 한 번 더 보는 게 낫지.” 홍민정 작가의 장편동화 ‘모두 웃는 장례식’에 나오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돌아오는 자신의 75번째 생일에 생전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한다. 할머니는 유방암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 치마에 수놓은 도라지꽃) 이 동화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6학년 윤서다.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엄마가 일하는 상하이로 떠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생전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하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슬하 4남매가 너무 놀라 갈등을 겪다 할머니 부탁을 받아들이는 과정, 생전 장례식을 준비해 치르는 과정 등이 담겨 있다. 윤서도 할머니가 일한 시장 사람들의 육성을 영상으로 담는 등 생전 장례식 준비에 참여했다.

이 동화에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도라지꽃이다. 시장에서 할머니한테 한복 만드는 법을 배운 아주머니가 생전 장례식을 치른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온다. 할머니 한복을 지어왔는데, 한복 치마엔 도라지꽃이 선명하다. <아주머니는 한복을 펼쳐 할머니의 몸에 대 주었다. 치마에 수놓은 보라색 꽃이 예뻤다. 할머니는 거칠고 마른 손으로 꽃무늬를 어루만졌다. “도라지꽃이네.” “네. 형님이 좋아하시잖아요.”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할머니는 생전 장례식날 이 한복을 입는다. ‘한복에 수놓은 도라지꽃이 햇살을 받아 곱게 빛났다.’ 윤서가 생전 장례식날 할머니에게 주는 감사패를 읽을 때 윤서 친구들이 할머니에게 주는 꽃다발에도 도라지꽃이 들어 있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에 들고 있던 감사패를 할머니에게 주었다. 승준이가 전해 준 보라색 도라지꽃이 들어간 꽃다발도 안겨 주었다. 꽃다발을 든 할머니는 오롯이 도라지꽃이 되었다.>이 할머니는 생전 장례식을 치른 지 두 달 남짓 지나 돌아가셨다. 태어나면 피할 수 없는 죽음, 장례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동화책이다. 생전 장례식이라는 소재를 너무 가볍게도, 너무 무겁게도 다루지 않은 것이 이 동화의 미덕이다. 예상 가능한 스토리인데도 몇몇 군데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읽었다.

2017년 일본 대기업 고마쓰의 안자키 사토루 전 대표는 말기암 진단을 받은 뒤 “40여 년 동안 신세 진 이들, 이후 여생을 같이 즐긴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신문에 생전 장례식을 열겠다는 광고를 냈다. 이 광고와 실제 생전 장례식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는 ‘생전 장례식’이라는 말을 이때 처음 들은 것 같다. ‘모두 웃는 장례식’은 이 기업인 얘기와 비슷하지만 시장에서 한복집을 운영한, 용기 있는 할머니 버전이다. 아들 친구가 ‘너희집 마당에 도라지꽃이 참 예뻤는데’라고 회상하는 것으로 보아 도라지꽃은 할머니의 전 생애를 보여주는 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출처, 조선일보 김민철의 꽃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