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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곰의하루

“아버님 날 낳으시고?....” 본문

나의생각

“아버님 날 낳으시고?....”

설악산곰 2022. 10. 17. 02:01

중학교 때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에다 갚을까?”라는 정철의 시조를 읽었는데 너무나도 이상했다. 낳고 기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가? 왜 아버지가 낳았다고 하는 것인가? 요즘과 달리 임신한 여성을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이었다. 여성이 집에서 혹은 조산소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그냥 그대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는 정철의 독창이 아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시경(詩經) ‘육아(蓼莪)’의 한 구절(부혜생아 모혜국아 父兮生我 母兮鞠我)을 인용한 것이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구절은 자식을 남자 계통만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꼭 집어 말하자면, 사람을 ‘남성’의 자식으로 보겠다는 생각이다. 정철이 역시 같은 생각으로 이 시를 인용했을 것이다. 요컨대 남성중심주의는 눈에 보이는 자명한 현상조차 왜곡하여 인식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주막집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다. 어느 날 저녁 주인 노파가 다산에게 ‘부모의 은혜는 같다지만 사실 어머니의 수고가 더 많은데, 성인(聖人)이 만든 제도는 왜 아버지를 무겁게 여기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기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노파는 성(姓)도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복제(服制)도 아버지의 복제가 어머니보다 무겁고, 부족(父族)은 일가를 이루지만 모족(母族)은 그렇지 않은 것을 근거로 꼽았다. 질문은 가부장제의 모순처를 찌르고 있었다.

다산은 위의 시경(詩經) ‘육아’를 들고 이어 석명(釋名)이란 책에 실린 ‘아버지는 나를 처음 생겨나게 한 존재’(父, 始生己也)라는 해석을 끌어와 가부장제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궁색했다! ‘육아’의 짧은 시구절과 석명(釋名)의 선언적 뜻풀이는 가부장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에 부족했다.

노파는 다산의 궁색함을 이렇게 넘는다. 아버지는 종자, 어머니는 토양이다. 토양이 종자를 길러내는 공은 크지만, 결국 온전한 생명으로 자라는 것은 종자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은 남성이고 여성은 다만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노파는 이것이 성인이 남성을 여성에 비해 더 중요하게 여긴 근거라고 말한다. 다산은 천지간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를 노파가 밝힐 줄 꿈에도 몰랐다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노파의 논리에 의하면, 자식은 오직 아버지만, 부계(父系) 혈통만 닮아야 한다. 하지만 자식은 어머니도 꼭 같이 닮는다. 유전학을 몰라도 자식이 부와 모 모두를 닮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만 종자일 수 없다. 노파의 말은 당연히 오류다. 문제는 다산은 물론 여성인 노파조차 가부장제를 진리로 수용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한 데 있었다. 가부장제는 권력의 문제다. 다산도 노파도 남성이 여성에 대해 권력적 우위에 서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 자체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라는 구절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달리 말해 진리가 된 가부장제의 모순적 권력이 ‘어머니의 출산’이란 자명한 사실을 ‘아버지의 출산’으로 왜곡하였던 것이다.(출처, 한겨레신문 장명관의 고금유사)

구태여 부권(父權)이 상실된 요즈음 세상에 이런 논쟁(論爭)이 무슨 실익(實益)이 있을까? “아버님 어머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아버님 날 기르시니....”하면 될일을 가지고. 학자(學者)라고 자부심을 가지신 분들의 편향된 사고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설악산곰)